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스샹달 전투 (문단 편집) === 공세 시작 : 제 1차 파스샹달 전투 === 파스샹달 전투에서 점령해야 할 중요 지점은 이프르 남동쪽의 겔루벨트 고지였다. 영국군 전선에서 2마일 떨어진 이 고지는 주변 저지대보다 약간 높은 곳으로 관측에 유리했다. 그리고 겔루벨트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열닷새 동안 400만 발 이상을 퍼부은 포격은 7월 31일 오전 04:00시 직전에 절정에 달했다. 7월 31일 오전 3시 50분, 고프의 제5군 9개 사단은 영국 제2군과 프랑스 제1군의 일부 포병대를 비롯해 야포 2,936문의 포격 지원을 받으며 공격을 시작했다. 제5군의 좌측에서는 프랑스 제1군의 2개 사단이 스테인스트라트와 부싱어 사이의 지역을 공격해 들어갔다. 영국 제2군도 제5군의 우측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공세 초기 성과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필켐 능선의 대부분과 능선의 중요 관측소들, 그리고 겔루벨트 고지의 서쪽 끝단이 영국군의 손아귀에 떨어지면서, 독일군은 1915년 5월 이래 장악해 온 유리한 고지들을 상실했다. 고장 잘 나기로 악명 높은 전차 역시 공세 첫날엔 2대 밖에 늪에 빠지지 않았고 아직까지는 땅의 겉 표면은 말라있었다. 플루머의 병사들도 홀레베커와 리 서쪽의 독일군 전초선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으며, 프랑스군은 스테인스트라트를 점령하고 빅스호터 외곽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핵심 공격 목표인 겔루벨트 고지에서 영국 제2[[군단]]은 독일군의 제1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악전고투를 벌여야 했다. 영국군은 [[전차]]까지 투입해 공격을 시도했으나 제2군단에 할당된 48대의 전차 중 공격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은 단 19대뿐이었고, 이마저도 호허 동쪽의 메냉 가도를 감제하고 있던 거대한 토치카에 설치된 독일군 야포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제2군단의 공격 기세가 꺾이면서 제5군의 공격 전면은 사실상 절반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부슬비가 오후 4시가 지나자 폭우로 바뀌면서 시야 범위도 크게 줄어들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반격에 나선 독일군이 영국군을 몰아내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겔루벨트로 전진하는 제18군단과 제19군단 병사들의 머리 위로 포격이 가해졌고 포격은 선두 부대가 급히 탈출해야 할 정도로 맹렬했다. 독일군의 포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호우가 쏟아져 파괴된 전투 지역은 곧 '''걸쭉한 진창으로 바뀌었다.''' 8월 2일이 되어서도 악천후가 계속되자 영국군은 공세를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공세 초반, 제5군은 3,000야드 정도를 전진했지만, 고프가 공세 첫날의 목표로 정한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가야 할 길은 멀기만 했다. 호우가 계속되자 영국군은 8월 중으로는 더 이상 제대로 된 대규모 공세를 펼칠 수가 없었다. 제5군은 8월 16일 랑에마르크를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고 적의 주의를 분산시킬 목적으로 랑스 근처의 [[탄광]] 지대에 [[캐나다군]] 군단을 투입했다. 겔루벨트 고지를 점령하려는 두 차례의 시도는 메냉 가도에 근접한 인버네스 숲과 글렌코스 숲에서 격전을 벌인 끝에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겔루벨트 고지에 일련의 성과 없는 공격을 퍼부었지만 얻은 땅은 없었고 인명의 손실은 커졌다. 참고로 8월 4일 더글라스 헤이그는 연이은 호우로 진격에 지장이 되자 땅이 굳을 때까지 잠시 공세를 멈추고 런던의 전쟁 내각에 보고를 보낸다. "(공세는) 크게 만족스러웠고 손실은 예상보다 적었다." 물론 공세 첫날 5만 8000명이 사상자(그 중 전사자가 2만명이다)가 발생한 솜 전투보단 훨씬 적었지만 피해는 아래에 있으니 한번 확인하고 비교해 보길 바란다. 7월 31일에서 8월 3일 사이에 제5군은 전사자와 행방불명자가 7,800명이라고 보고했고, 제2군은 1,000명 이상으로 보고했다. 부상자를 포함한 총 사상자는 프랑스 제1군의 사상자를 더하여 약 3만 5000명이었고, 독일군도 비슷한 손실을 입었다. 그렇지만 독일군은 사활이 걸린 땅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고 반격 사단[* 일명 Eingreif Division 전선과 방어진지의 유기적인 연계를 통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방어를 하기 위해 조직된 전투부대]을 조금도 투입하지 않았다. [[바이에른 왕국]]의 루프레히트 왕세자는 7월 31일 저녁 일기에 "결과에 매우 만족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루프레히트는 '''희생이 얼마나 커지든 전장이 얼마나 진창이든 계속해서 공격하겠다'''는 헤이그의 결의를 알지 못했다. 8월 2일 비로 인해 공세가 지연된 후 8월 10일 겔루벨트 고원 북쪽의 베스트훅(Westhoek)을 점령하기 위한 2군단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독일군의 막대한 포화를 무릅쓰며 영국군은 간신히 일부 지역을 점령했으나, 독일군 포병과 보병의 공세로 약간의 땅을 얻는데 그쳤다. 영국군은 막대한 피해와 진창인 전장환경으로 지쳤고, 영국군 포병은 비정상적인 전장환경으로 인해 겔루벨트 고원의 독일군 포병을 제압하는데 실패했다. 독일군 역시 이 진창속에서 주둔하다보니 신체적으로 지쳤지만, 영국군보다는 사기가 높았다. 후버트 고프는 8월 15일 공세를 제개하고자 했지만, 또다시 내리는 비로 공세는 24시간 연기된다. 8월 16일에서 18일 이프르 북쪽에서 고프의 5군이 랑에마르크를 점령하려는 일명 랑에마르크 전투가 일어났다. 영국군 보병이 엄청난 피해를 무릅쓰며 전진했지만 독일군 포병에 의해 다시 원위치로 돌아갔고, 독일군도 영국군 포병에 의해 진격이 저지되며 서로 인명만 소모되는 소모전 양상으로 진행된다. 8월 22일 랑에마르크 지역에서 또다시 영국군이 공세에 들어갔지만 전차까지 동원하여 전투를 했음에도 전차는 진창에 빠져 무용지물이 되고,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며 사실상 이날 공세는 영국군의 패배로 돌아간다.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이동한 거리는 550m에 불과했다. 8월 23일 내리기 시작한 비는 26일에 들어서 폭우가 쏟아졌다. 계속되는 비로 인해 25일 예정된 공세는 취소되고 만다. 8월 24일 파스샹달 지역을 감제할 수 있는 중요 요충지이자 파스샹달 전투의 목표인 겔루벨트 고지에 대한 3번째 공세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프르 방면 공세를 고프의 제5군에서 플러머의 제2군으로 넘긴다. 8월 25일, 헤이그는 뒤늦게 작전 입안 단계에서 고프에게 지휘를 맡긴 것이 실수였음을 인정하고 전체 전투의 지휘와 제2군단의 전선을 제2군 사령관 허버트 플러머 장군에게 넘겼다. 헤이그는 플러머에게 3주의 시간을 줄 테니 다음 단계의 공격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본국에서 내려오는 엄청난 압력의 공세 중지 명령을 자기 선에서 최대한 막아내었다. 8월 27일, 제1차 파스샹달 전투가 막이 내리기 직전 전쟁으로 인해 수목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글렌코스 숲과 인버네스 숲을 차지하기 위한 영국군의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고 통과불능의 지역과 독일군의 맹렬한 사격으로 인해 전투는 중단되었다. 7월 31일 이후로 약 1만 8000명의 병사들이 전사하거나 행방불명(행방불명자들은 상당수가 구덩이 속에서 익사한 자들이었다)되었고 5만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실 1차 파스샹달 전투는 참전 군인들에게 있어 혹독한 전투였다. 전쟁으로 완전히 초토화된 전장터는 병사들에게 있어 관측과 저격의 대상이 되었고 공세를 시작하려 하면 어김없이 포탄이 날아오곤 했다. 런던의 정치가들에게 있어 이 전투는 계속해서 지속해야 하는지 의문을 안기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